독서

[독서 후기]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 룰루 밀러

김히망 2025. 3. 16. 11:10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데뷔작! 집착에 가까울 만큼 자연계에 질서를 부여하려 했던 19세기 어느 과학자의 삶을 흥미롭게 좇아가는 이 책은 어느 순간 독자들을 혼돈의 한복판으로 데려가서 우리가 믿고 있던 삶의 질서에 관해 한 가지 의문을 제기한다.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엄연한 하나의 사실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또 무엇을 잘못 알고 있을까?” 하고 말이다. 누군가에게는 이 질문이 살아가는 데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진실한 관계들
저자
룰루 밀러
출판
곰출판
출판일
2021.12.17

다시 책을 열심히 읽어보려고 노력하던 중에 어디선가 낯이 익은 제목이라 책을 고르게 되었다.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니, 황당한 제목이다. 표지 한켠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상실, 사랑, 그리고 숨어있는 삶의 질서에 관한 이야기



사랑에 고민이 많던 시기에 이 책을 읽게되었다. 저자인 룰루 밀러는 본인의 실수로 사랑하는 사람(곱슬머리 남자)과 헤어지고 다시 재회할 수 있을거라는 희망을 가지고 살았다. 3년 가까이. 그때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라는 분류학자를 떠올리게 되고, 그의 삶의 방식에 대해 궁금해하기 시작한다.
데이비드는 평생 일궈온 연구 성과가 물거품이 되었을 때도, 사랑하는 형, 아내, 딸이 세상을 떠났을 때도 자신의 길을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처음에 그녀가 데이비드를 알게 되었을 때, 그를 어류수집계의 이카로스처럼 생각했다고 한다. ‘열역학 제 2법칙’에 따라 세상의 엔트로피는 증가하기만 하는데, 그것을 거스르려 하는 모습이 자연 앞에 오만하다고.
다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녀에게 찾아온 혼돈의 시기에 데이비드가 궁금해졌다.

어쩌면 그는 무언가를, 끈질김에 관한 것이든, 목적에 관한 것이든, 계속 나아가는 방법에 관한 것이든 내가 알아야 할 뭔가를 찾아낸 것인지도 몰랐다.

결코 승리하지 못할 거라는 그 모든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로 하여금 혼돈을 향해 계속 바늘을 찔러 넣도록 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그가 우연히 어떤 비법을, 무정한 세계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는 어떤 처방을 발견한게 아닐까 궁금했다.

어쩌면 그는 무언가 핵심적인 비결을 찾아냈을지도 몰랐다. 아무 약속도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희망을 품는 비결, 가장 암울한 날에도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비결, 신앙 없이도 믿음을 갖는 비결말이다.


책을 읽으면서 나도 궁금했다. 데이비드가 처한 상황은 최악인데, 그가 계속 해서 나아갈 수 있었던 원동력. 정말 그가 뭔가를 찾아낸걸까.
룰루 밀러처럼 나도 그게 궁금해서, 알고싶어서, 나도 나의 세계에서 계속 나아갈 힘을 얻고싶었다. 결국 나는 그 답을 룰루 밀러와 데이비드로 부터 얻을 수 있을까?

왜인지 모르겠지만 읽을 때마다 울컥하게 되는 부분이 있다.

도시의 자주색 불빛이 창으로 쏟아져 들어올 때면 나는 그 모든 것의 현실성을 무시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곤 했다. 내 인생에 생긴 공백을, 내가 품은 희망의 빛이 나를 더 따뜻이 데워줄수록 점점 더 넓어지고 차가워지기만 하는 그 공백을 말이다.
그래서였다. 나는 절박했다. 단순하게 말하자.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책에서, 망해버린 사명을 계속 밀고 나아가는 일을 정당화하는 그 정확한 문장을 찾아내는 것이 내게는 절박했다.

내가 품은 희망의 빛이 나를 데워줄수록, 넓어지고 차가워지는 공백…
망해버린 사명을 계속 밀고 나아가는 일을 정당화 하는…
내가 품은 희망의 빛과 망해버린 사명…
과연 두 사람은 스스로가 품은 희망의 빛이 사실 잘못되었다는거… 틀렸다는거 … 그 현실을 받아들인걸까, 적어도 룰루 밀러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중인 것 같았다. 더 넓어지고 차가워지는 그 공백을 애써 무시하고 싶었겠지만.
데이비드가 모든 현실을 받아들이고, 스스로가 품은 희망, 사명이 고꾸라졌다는걸 인정하기에는 그의 삶에 부정하고 싶은 현실이 너무 많았을 것 같기도 하다. 그렇기에 끝까지 본인의 희망과 사명을, 그것이 틀린 것일지 언정, 그가 스스로 틀렸다는 것을 알건 몰랐건, 정당화한 방법이 뭔지 모르겠지만 끝까지 지켜냈다는게 그의 대단한 점이다.

데이비드는 “자기가 원하는 것은 다 옳은 것이라고 자신을 설득할 수 있는 무시무시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 …
“자기 길을 가로막는 모든 걸 뭉개버릴 수 있다고 믿는 그의 능력은  ….
특히 시련의 시기에는 더욱더 자기기만에 의존했던 듯하다. 운명의 형태를 만드는 것은 사람의 의지다.

위 내용으로 나는 어느정도 데이비드가 정당화한 방법을 알아냈다. 자기기만.
사실 이것만으로는 그의 모든 행동을 설명하기 부족하다. 추가로 그의 어릴 적 경험, 루이 아가시의 캠프에서 자연의 사다리에 대해 생각하게 된 그 순간, 모든 그의 퍼즐이 맞춰진 순간이 결정적이었을 것이다. 그의 세계관과 모든 행동양식을 완성시킨 순간.

어떨 때는 그가 부러웠다. 하고자 하는 행동에 거침이 없는 모습. 망설임이 없는, 항상 확신에 찬, 모습이 그려졌다. 그 행동이 비윤리적이거나, 비상식적이거나, 비논리적인 순간에도 자신이 하고있는 행동이 옳다고 굳게 믿을 수 있는 그가 부러웠다. 심지어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에도.(그가 인정했을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인정하지 않았겠지만)
하지만 룰루 밀러는 모든걸 받아들이기로 했다. 열역학 제 2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 그녀가 사랑했던 곱슬머리 남자는 그에게 돌아오지 않을거라는 것.. 그리고 세상의 혼돈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살펴보기로 했다. 그리고 모든걸 받아들인,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 새로이 보이기 시작했을 것이다.

물고기가 존재하는 세상의 데이비드와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의 룰루 밀러, 둘 중 누가 더 행복했을까?
누가 옳고 그르건, 나는 더 행복한 사람을 따라하고 싶다.
데이비드는 스스로를 속이느라 매순간 괴롭지 않았을까?
룰루 밀러는 3년이나 부정한 현실을 받아들이는 순간이 정말 괴로웠을거같다. 그리고 엔트로피가 계속해서 증가하는 현실도 순간순간 괴로웠겠지.,
고통을 할부하냐, 일시불로 하느냐의 차이가 아니라.. 이건… 뭐랄까… 다른 세계는 있지만, 그것은 이 세계 안에 있다는 말이다.
지금 내 관심사가 상실, 삶의 방향, 사랑이라서 이런 결론에 다다랐지만, 언젠가 관심사의 순서가 바뀌면 다시 한 번 이 책을 읽어보고 싶다. 그땐 또 다른 관점에서, 또 다른 감상이 나올 것 같다.
간절히 원했던 미래가 머지않아 펼쳐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