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독서] 흰 - 한강

김히망 2025. 5. 4. 22:55

세상의 모든 '흰' 것, 그리고 우리가 희게 살아야 하는 이유
 
'하얀'은 솜사탕처럼 깨끗하기만 한 느낌, 그리고 삶과 죽음이 소슬하게 배어있는 느낌의 '흰'. 작가가 풀어가고 싶은 것은 '흰' 책이었다. 
한강 책은 어렵다고 들어서.. 언젠가 읽어봐야겠다는 막연한 생각으로 미루고 있었는데, 독서 유튜버의 추천으로 읽게 되었다. 나는 아이보리도 베이지도 아닌 하얀 색을 제일 좋아하는데 깨끗하고 밝은 느낌이 좋아서다. 하얀 색을 좋아하지만 '흰' 색을 좋아한다고 생각하면 어쩐지 느낌이 다른데 그 이유를 작가의 말에서 알 수 있었다. '흰' 이란 단어는 어쩐지 마냥 밝고 깨끗한 느낌은 아니다. 
새벽 안개, 무거운 눈보라, 겨울 입김, 높은 산에 걸쳐있는 안개구름 같은 이미지가 떠오른다. 
 
이 책이 딱 그렇다. 하얀이 아니라 '흰'.
아직 완전히 이 책을 이해했다고 볼 순 없겠으나 2회독 한 후 내가 느낀 바를 몇 자 적어보려 한다. 
하지만 아직 부족하기에 .. .... .......... 시간이 좀 더 지나서 다시 읽어봐야겠다. 
 

이 도시와 같은 운명을 가진 어떤 사람. 한차례 죽었거나 파괴되었던 사람. 그을린 잔해들 위에 끈덕지게 스스로를 복원한 사람. 그래서 아직 새것인 사람. 어떤 기둥, 어떤 늙은 석벽들의 아랫부분이 살아남아, 그 위에 덧쌓은 선명한 새것과 연결된 이상한 무늬를 가지게 된 사람. 
- 흰 도시

이미 파괴된 적이 있는 사람. 그리고 그 위에 스스로를 다시 건축해낸 사람. 
파괴된 옛 것과 그 위에 다시 건축한 새 것, 그 경계를 가지게 된 사람
파괴된 적이 있는 사람 .. 무엇이 그를 파괴했을까? 파괴된 사람은 어떤 마음일까? 옛 것과 새 것의 경계는 어떻게 구분될까?
과거에 무너진 적이 있는 사람도 파괴된 적이 있는 사람일까? 파괴된 적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 누구나 한번쯤 마음에 커다란 구멍이 난 적이 있을텐데.. 다시 구멍을 메우면서 그 경계가 분명 남았을텐데. 여기서 말하는 파괴는 더 큰 구멍이 필요한걸까?
 

그는 결벽적일만큼 윤리적인 태도를 지니고 살아가게 되는데, 선택의 순간마다 어째서인지 히말라야의 설산에 눈이 내리는 압도적인 풍경이 그의 눈을 가리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그는 누구도 쉽게 내리기 어려운 결정을 하고, 그 결과 끊임없이 고초를 겪는다. 
- 만년설

이건 공감되는 부분이 있다. 나도 어떤 결정을 할 때 소중한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리곤 한다. 내가 이 사람들에게 부끄러운 일을 하고있는건 아닌지. 물론 내가 지금까지 내렸던 결정들에 쉽게 내리기 어려운 결정은 없었던 것 같다. 히말라야의 설산에 눈이 내리는 압도적인 풍경처럼. 희게 살아야겠다.

아무런 고통도 겪지 않은 사람처럼 그녀는 책상 앞에 앉아있다. 
방금 울었거나 곧 울게 될 사람이 아닌 것처럼.
부서져본 적 없는 사람처럼.
영원을 우리가 가질 수 없다는 사실만이 위안이 되었던 시간 따위는 없었던 것처럼. 
- 백열전구

지금 책상에 앉아있는 그녀는 아무런 고통도 겪지 않은 사람처럼 있지만,
방금 울었고 곧 울거다.
부서졌었다.
영원을 우리가 가질 수 없다는 사실만이 위안이었던 적이 있었다.

영원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이 위안이라는 말은
영원할 것 같아도 모든 일엔 언젠가 끝이 있다는 사실이 위안이었나보다.
끝이 있길 간절히 바라는 터널 속을 지나고 있었나보다.
사람이 참 그렇다. 너무 행복할 때는 끝이 없길, 영원이 존재해서 이 순간이 끝나지 않길 바라지만, 조금만 힘든 순간이 오면 얼른 모든게 끝나버리길 바란다.
내가 영원을 바랐던 순간들, 내가 종결을 바랐던 순간들이 떠오른다. 영원을 바랐던 순간들이 더 많이 기억에 남았나보다. 행복했던 기억들. 결국 영원을 가질 순 없어서 지금은 종결된 순간들.
 

자신을 버린 적 있는 사람을 무람없이 다시 사랑할 수 없는 것처럼. 그녀가 삶을 다시 사랑하는 일은 그때마다 길고 복잡한 과정을 필요로 했다. 

왜냐하면, 당신은 언젠가 반드시 나를 버릴테니까.
내가 가장 약하고 도움이 필요할 때, 
돌이킬 수 없이 서늘하게 등을 돌릴 테니까.
그걸 나는 투명하게 알고 있으니까.
그걸 알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으니까.
- 얇은 종이의 하얀 뒷면

 얇은 종이의 하얀 뒷면에는 앞면에 쓴 글씨가 꾹꾹 비쳐보일 것이다. 다시 그 뒷면이 희기만 했던, 글씨를 쓰기 이전으로 돌아갈 순 없다. 자신을 버린 적 있는 사람을 무람없이 사랑할 수 없는 것처럼.
내 삶을 버린 적 있는 나는 언젠가는 또다시 삶을 버릴 수 있다. 내가 필요할 때 내 손을 놓을 수 있다.
다시 전처럼 무람없이 사랑하기란 정말 불가능할까… 그냥 잊으면 안될까, 모르는 척 할 순 없을까? 언젠가 나를 또 다시 버릴거라는거, 나는 또 다시 버려질거라는거, 나는 다시 그의 등을 보게될거라는거. 그걸 기억하고 되뇌여서 좋을게 없다… 내가 내 마음에 생채기만 계속해서 내게될 뿐이다.
 

작가가 소설을 통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들에 당장 대답할 필요는 없다. 
"물음들은 대답에 이르는 길들이다. 대답이 언젠가 주어지게 될 경우, 그 대답은 사태실상에 대한 진술 속에 존립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의 어떤 변화 속에 존립할 것이다." - 마르텐 하이데거, 사유의 사태로
 
이 책이 나에게 던지는 물음은 뭘까?
 
질문에 답을 내기 위해 사고한다.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나아간다. 
질문에 답하기 위한 또 다른 질문을 던진다. 
질문이 충분히 내 관점에서 전개되었을 때, 질문을 숙고하는 사유가 변화하고, 이 '변화'에 답이 있다. 
해결책으로서의 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건 수학 문제도 아닌데, '답' 자체를 찾아내고자 하면 질문을 숙고할 수 없다. 
질문들 사이의 간격 혹은 변화를 더듬음으로서 사유해야 한다.